상수(常數)는 관리당하고, 변수(變數)는 협상한다
요즘 중동발 뉴스와 이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보다 보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28년 전, 저는 외국의 대학원에서 꽤 엉뚱한 제목의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통일한국은 친미를 유지할까?, 친중으로 기울 수 있을까?’ 주변에서는 통일까지는 너무 먼 예상이고 주제는 아닌지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었지만, 저는 좀 다른 데 꽂혀 있었습니다. 통일한국의 외교적 좌표를 결정하는 건 미국도 중국도 아니고, 사실은 일본이라는 것. 논문 초고를 들고 지도교수님 연구실에 갔을 때의 일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한참을 읽으시더니 안경을 벗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논문의 방향성이 맞다면, 지금 일본의 외교정책 방향은 수정해야 할 부분이 많겠군?” 교수님은 그 논문에 대단히 큰 관심을 보이셨고, 시각과 결론을 높이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 논문의 한가운데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일본이 미국에 주는 이익보다, 중국이 미국에 주는 이익이 커지는 순간 — 미국은 동아시아를 중국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하고, 일본은 외면당한다.
28년이 지난 지금, 현재의 국제정세를 보면서 그 문장을 다시 꺼내 들게 됩니다. 중동발 위기가 세계를 흔들고, 미국의 시선이 동아시아에서 잠시 멀어진 사이, 일본과 미국과 한국, 그리고 중국의 역학 관계가 현실화되고 있는 단초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졌으니까. 할 수 없지” — 어느 술자리에서
논문을 쓰던 시절, 대학원 동기 중에 일본인 친구와 어느 날 술자리에서 한일관계 이야기가 나왔고, 제가 물었습니다. “일본은 왜 그렇게까지 미국편만 들고 심지어 부당한 요구를 수용하냐?” 그 친구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웃었습니다. “당연하지 않아? 졌으니까. 할 수 없지.” 농담처럼 말했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 불편해하지 않는 것이 저한테는 더 충격이었습니다. 그건 체념이 아니라, 진심으로 당연하다고 느끼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뒤로 일본에서 오래 공부하고 일하면서, 저는 그 친구와 비슷한 얼굴들, 비슷한 눈빛을 수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회의실에서, 술자리에서,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대화 속에서. 강한 쪽에 맞추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 표정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더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미국의 경제 압박이 한창이던 때, 일본의 한 TV 토론회에서 이런 논의가 진지하게 오갔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일본이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패널들이 진지하게 찬반을 따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인인 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었습니다. 나라의 주권을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 ‘합리적 선택지’로 토론되는 나라. 그 친구의 “졌으니까, 할 수 없지”라고 이야기한 것이 개인의 감각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감각이었다는 것을, 그 토론을 보며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별명, 다른 반응
미국의 푸들.’ 이 별명을 가진 나라가 둘 있습니다. 영국과 일본.
영국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진짜로 화를 냅니다. 마음속에 “미국? 우리 조상이 메이플라이호를 타고 건너가서 만든 나라잖아”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가(本家)가 왜 분가(分家)한테 끌려다녀야 하느냐는 거죠. 일본은? 불편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영국처럼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 그 술자리의 친구처럼, 불편함을 안고도 당연한 듯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 친구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뿌리가 깊은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랜 시간 일본 사회의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그 밑바닥에 흐르는 어떤 오래된 감각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이묘(大名/주군)가 바뀌면 충성도 바뀐다
일본의 전국시대(戦国時代).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차례로 천하를 놓고 싸우던 시대에, 일본 백성들은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어제의 주군이 쓰러지면, 오늘의 새 주군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나를 먹여 살려주는 쪽이 나의 주군. 거기에 배신이라는 단어는 붙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한국의 장기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잡으면 그 말은 판에서 사라집니다. 한번 진 말은 끝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장기, 쇼기(将棋)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잡으면 그 말이 내 편이 됩니다. 잡힌 말은 새 주인 아래에서 다시 싸웁니다. 배신이 아니라 전환이고, 충성의 대상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전국시대의 생존의 본능이 놀이판 위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죠.

그래서인지, 일본에는 한국의 ‘의병(義兵)’에 딱 맞는 표현이 없습니다. 나라가 무너져도 스스로 칼을 들고 일어서는 백성. 주군이 아니라 땅과 이웃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그 개념 자체가 다이묘(大名)가 바뀌면 충성할 대상도 바뀌는 감각과는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일본의 민주주의는 일본 국민이 피 흘려서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한국은 4·19와 6월 항쟁 등 대부분의 국가들은 민주주의 제도를 얻어내기 위해서 많은 국민들의 투쟁과 피를 흘려 얻어 내었지만, 일본의 민주주의는 1945년 미국과 맥아더가 가져다준 공짜로 얻은 것입니다. 정말 특이하게도 일본은 유사 이래로 일본 백성과 국민이 자기 나라의 권력자와 맞서 싸워 정치제도나 사회제도를 바꾼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전국시대의 생존 감각, 그리고 위에서 내려온 민주주의. 이 두 가지가 합쳐졌을 때, “강한 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뭐가 이상해?”라는 물음은 다른 나라 국민에게는 전혀 다른 무게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의리(義理)의 온도가 다릅니다
이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의리(義理).
한국과 중국에서 의리란, 예(禮)와 신(信)이 바탕에 깔린 감정의 단어입니다. “네가 힘들 때 내가 있었잖아.” 삼국지의 도원결의(桃園結義)처럼, 수평적이고, 마음에서 나오고, 깨지면 비극이 됩니다.
반면, 일본에서 義理(기리)는? 밸런타인데이에 직장 동료에게 의무감으로 돌리는 초콜릿, 기리초코(義理チョコ)의 감각과 비슷합니다. 좋아서가 아니라, 안 하면 이상하니까 하는 것. 감정이 아니라 의무, 마음이 아니라 체면입니다. 물론 야쿠자 영화나 사무라이 서사에는 조직과 동료를 위한 목숨을 건 행동도 나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사 계급이나 극단적 집단 안에서의 수직적 충성에 한정됩니다. 한국과 중국의 의리가 “너와 나 사이의 마음”이라면, 일본의 義理는 “이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국가 간 관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대미 충성은 기리에 가깝습니다. 졌으니까, 강하니까, 해야 하니까. 한국과 중국에 대한 태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하면 하고, 필요 없으면 안 합니다.
합리적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뒤집히는 조건
여기서 잠깐 한국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냉정하게 따지면, 현재의 정치·경제 체계 안에서 한국이 일본과 우후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상당히 합리적입니다. 미일 동맹을 중심으로 짜인 동북아 안보 질서, 반도체·소재·장비 분야의 공급망, 그리고 미국이라는 공통 상수(常數)를 통한 간접적 안전보장. 이 구조 안에서 한국이 일본과 협력하는 것은 감정과 별개로, 이익의 논리가 작동하는 선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합리적 선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특히 미국이 지금의 상수(常數)가 아닌 변수(變數)가 될 경우
일본이 한국을 동등한 파트너로 대하고, 역사적 무게를 함께 지려는 자세를 보인다면 — 한국은 이 구조 안에 머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한국을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카드로 취급하거나,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한국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습니다. 중국이라는 선택지가요.
최근 한국 내 반중 감정이 상당히 강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5천 년 이웃의 체화, 유교적 세계관의 공유, 예(禮)와 신(信)의 온도가 비슷하다는 감각 — 이런 것들은 논리가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몸에 밴 것이어서,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일본보다는 중국”이라는 직관이 여전히 작동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본이 알아야 할 것은, 한국의 선택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놓여 있는 지금이야말로 그 선택을 공고히 할 기회라는 점입니다. 그 기회를 당연시하는 순간, 저울은 기울기 시작할 거라 생각합니다.
저울이 기울 때
28년 전 논문의 명제는 단순했습니다. 중국이 미국에 주는 이익이 일본보다 커지면, 일본은 외면당한다. 여기서 한 발 더 — 한국이 중국과 함께 미국에 주는 이익이 크다면? 미국 입장에서 일본 하나보다 중국+한국이라는 더 큰 시장, 더 큰 공급망을 택하는 것이 합리적이 됩니다. 그때 일본은 이웃에게도, 강자에게도 이중으로 외면당할 수 있습니다.
이 논리가 작동하려면 전제가 하나 필요합니다. 미국이 동북아를 더 이상 패권의 영역이 아닌, 이익의 영역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 전환은 현재의 국제정세를 보면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2026년 현재, 미중은 겉으로 관세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면에서는 끊임없이 거래합니다. 2025년 상호 관세를 125%에서 10%로 극적 인하, 1년 연장 합의까지. 중국 없이는 미국 경제가 안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반면 일본은?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에 “많은 일본 관측자들은 트럼프가 일본의 이익을 훼손하는 형태로 중국과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불안이 공식 문서에까지 올라온 겁니다.
닛폰제철의 US스틸 인수 사례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가장 충성스러운 동맹국의 기업이,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 “국가안보” 이유로 인수를 불허당했고, 미국 경쟁사 CEO로부터 “중국보다 더 나쁜 나라”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충성의 값어치가 예전하고 달라졌습니다. 저울 위에서 무게가 가벼워지면, 아무리 오래 모신 다이묘도 돌아서는 법이죠.
한반도의 역학도 뒤집혔습니다
통일한국을 이야기하려면, 북한이라는 변수도 짚어야 합니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의 전략은 단순했습니다. 적화통일. 지금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김정은이 핵무기에 올인하는 이유는 한국을 삼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고 생존하려는 전략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정보기관조차 “핵무기를 체제 안전의 보증인으로 본다”라고 평가하죠. 카다피와 후세인의 운명을 교과서처럼 학습한 결과입니다. 과거에는 북한이 남쪽을 향해 칼을 빼 든 구도였다면, 지금은 한국과 미국의 북진을 두려워하는 구도로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변수의 가치 — 미국에, 일본에게, 그리고 중국에게
결국 이런 그림이 그려집니다.
미국에 일본은 항상 상수(常數)였습니다.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동맹. 반면 한국은 변수(變數)에 가까웠죠. 정권이 바뀌면 외교 노선이 흔들리고, 한미 간 긴장도 종종 찾아옵니다. 하지만 변수가 반드시 약점은 아닙니다. 상수는 움직이지 않지만, 변수는 움직입니다. 움직이는 쪽이 판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수의 무게를 가장 먼저 느껴야 할 쪽은, 어쩌면 미국보다 일본인지도 모릅니다. 한국이라는 변수가 일본과 같이 하는 지금의 구도는, 일본에게 대단히 유리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이 한국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구도이기도 합니다.
중국 역시 이 변수를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한국이 미일 질서 안에 단단히 자리 잡으면, 중국의 동북아 전략에서 가장 큰 빈자리가 됩니다. 반대로 한국이 일본과 같이 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중국 쪽으로 무게를 옮기기 시작하면, 동북아의 판 자체가 바뀝니다. 중국이 한국이라는 변수를 진지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이 취해야 할 스탠스는, 이 변수로서의 위치를 더 크게 만들되 그 변수가 각국의 이익으로 전환되는 방향으로 설계하는 것입니다. 일본처럼 ‘항상 예스’하는 상수가 되는 것이 답이 아닙니다. 미국이 “한국이라는 변수를 잡고 있어야 이득이다”라고 판단하게 만들고, 일본이 “한국을 당연시하면 안 된다”라고 느끼게 만들고, 중국이 “한국을 무시하면 손해다”라고 계산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한국 외교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수는 당연하게 여겨지고, 변수는 신경 써야 합니다. 신경 쓰이는 쪽이, 사실은 더 중요한 쪽입니다.

에필로그
28년 전 술자리에서 “졌으니까. 할 수 없지”라고 말하던 그 친구의 얼굴이 종종 떠오릅니다. 불편하지 않던 그 표정. 그게 한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한 나라의 오래된 감각이었다는 것을, 저는 그 뒤로 28년에 걸쳐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대국은 강자에게 고개를 잘 숙이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웃과 강자의 허락 없이, 자기 이름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일본이 자기 이름으로 이웃과 악수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이 지역의 미래는 계속 미국과 중국의 함수로만 쓰일 것입니다. 또한 가까운 시일 안에 중국이 미국에 주는 이익이 일본의 그것보다 커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순간 일본은 자기편에 서 줄 나라가 동북아에 당연히 한국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한국이 변수로서의 자기 가치를 스스로 설계하면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전략과 방안을 지금부터 진지하게 준비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